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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디자인 아티스트의 살롱
여백이 있는 풍경/지혜로운 삶

#17-05 [인문일반]<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존재의 의미 공부

by CreActive Coach 2017. 2. 18.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국내도서
저자 : 고미숙(Ko Mi-Sook)
출판 : 북드라망 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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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다. 기사로도 많이 마주했고, '감이당'이라는 공간도 관심이 갔었다. 아주 오래전에 <열하일기>를 읽어보기도 했었다. 그렇게 잊고 지냈는데, 요즘 공부에 대한 생각, 책읽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고미숙 작가는 어떤 이야기로 나에게 길을 제시할까 알고 싶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으면 공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공부는 결국 책읽기, 특히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읽기는 눈으로 읽는 것도 좋지만, 입을 통해서 소리를 내는 '암송, 낭독'을 적극 추천하고 있다. 온전히 기를 통해서 온 몸이 우주와 반응을 한다는 의미다.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를 해주시고 계시지만, 문체가 내게는 '현학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공부, 고전읽기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읽기를 통해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실까? 부럽기도 하고, 이런 문체도 현학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나의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닐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그동안 간혹 낭독하며 책읽기를 해보긴 했는데, 고작가님 제안대로 제대로 낭송하며 책읽는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고전이란, 몸과 인생을 완전 바꿔주는 지혜와 비전으로 가득 찬 책을 말한다. 

대중지성! 꿀벌이나 개미떼처럼 언제나 무리로 움직이고, 오직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대중지성은 '무리지성'이기도 하다. 대중보다 더 대중적이고, 지식인들보다 더 지성으로 충만한 집단. 테크노크라트들이 '지식, 자본, 국가'의 삼위일체 속에서 움직인다면, 대중지성들은 그 외부에서 '지성의 교해'에 몸을 던진다.
중요한 건 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가 아니라, 어떤 식의 공부가 실현되느냐인 것.
모든 차이와 이질성을 말끔이 지워버리고 아주 평균적이고 상식적인 존재, 곧 국민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학교의 주어진 소명이다. 인간은, 아니 살아있는 것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뭔가를 배운다. 살아있음 자체가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뭔가를 끊임없이 학습하는 과정이 아닌가. '공부는 그 자체로서 존재의 기쁨이자 능동적 표현'.인생과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는 것. 
노인의 지혜와 10대의 역동성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은 진정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노인문제를 꼭 경제적 차원에서만 사유하는가? 노인은 음의 기운이, 젊은이는 양의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서로 어울려야 양쪽 다 건강해질 수 있다고 한다. 노인은 원숙한 시야를 바탕으로, 청년은 젊음의 역동적 기운으로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면 된다. 한 사회가 공동체적 리듬을 가지려면, 노인은 청년과 함께 섞여야 하고 어린이와 청년은 노인과 함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연령대의 에너지와 지혜를 주고 받을 때 비로소 집합적 기운의 분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부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일진대, 거기에는 우와 열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갈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따름이다. "남이 한 번 해서 그것에 능하다면 자기는 백번 할 것이며, 남이 열 번해서 그것에 능하다면 자기는 천번 할 것이다.(중용)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꾸준히 밀고가는 항심과 늘 처음으로 돌아가 배움의 태세를 갖추는 하심, 공부에 필요한 건 오직 이 두가지 뿐이다.
독서야말로 골방에 앉아서도 혹은 초야에서 밭을 갈면서도 천하고금의 이치를 한눈에 꿰뚫을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다. 토론이니 자기주도 학습이니 하는 것도 세계와 대상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되는 법이다. 
독재정권 시절은 대량생산의 시대였고, 그때는 창의성 따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상품이 시장에서 먹히려면 차별성이 뚜렷해야 한다. 쉽게 말해 튀어야 한다. 그러자니 사회 전체가 온통 창의성, 개성, 사고력 따위를 떠들어대기에 바쁜 것이다. 이때의 창의성이란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는 기획력, 신상품 개발의 아이디어 따위를 의미한다.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아니라, 포장과 이미지를 적당히 바꿀 줄 아는 능력에 해당하는 셈이다. 자율성과 창의성은 나란히 간다. 자율적이지 못하면서 창의적 사고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까닭이다. 문제는 자율성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간주하는데 있다.
독서와 논술을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어진 문제에 답하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내가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타자들과의 향연, 그를 통한 존재의 대반전, 그것이 곧 배움이다. 하여, 배움에는 반드시 스승과 벗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 그것은 곧 사제지간이다.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뚦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이야말로 진정, '미래'적인 것이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도래할'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고전이 바로 그렇다. 과거로부터 온 것이지만 늘 우리에게 도래할 시간에 대해 예고해준다. 
학교는 아이들을 '유년기'라는 연령대에 묶어 놓고 그 단계에 맞는 사고만을 주입함으로써 나머지 다른 능력을 몽땅 회수해 버린 것이다. 그래야만 교사와 어른들에게 기꺼이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근데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Commune)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항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스승이란 무엇인가? 길을 안내해주는 자이다. 도반이란 그 길을 함께 가는 벗들이다.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변신>이나 <오감도>를 묵독을 하면 한없이 무겁고 진지하고, 또 난해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그걸 소리내어 읽는 순간, 그 작품들은 전혀 다른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암기가 묵독에 기초한다면, 암송은 청각에 기초한다. 암기가 개별적 활동이라면 암송은 집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암기를 단체로 할 순 없지만, 암송은 많은 사람과 할 수록 효과적이다. 암기가 두뇌 플레이라면, 암송은 신체 운동이다. 암기를 많이 하면 신체가 허약해지지만, 암송은 신체 전체의 기운을 활발하게 소통시킨다. 암송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독서란 소리내어 읽는 것이지 속으로 달달 외는 것이 아니었다. 낭송이 지니는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것은 소리를 통해 몸의 안과 밖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집합적이다. 혼자서 할 때조차 그것은 외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소통에의 욕구가 없이는 낭송이 불가능하다. 
암송이야 말로 지식을 세상에 순환시키는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을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방법이 가장 단순한 학습법이라는 것이다. 경전을 터득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만, 외국어를 습득하는데도 암송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그 나라 말로 된 수준높은 작품을 하나 골라 주구장창 소리 내어 암송하면 된다. 목소리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낭송을 하면 된다. 성대 좋아지지 머리 좋아지지 일속이조다. 목소리와 말을 훈련하고 싶다면, 인생과 우주를 논하는 수준 높은 글들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암송을 제대로 하려면 발성기관을 활발하게 움직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오장육부 중에서 특히 신장에서 기운을 끌어올려야 한다. <동의보감>에도 나와있듯이, 신장이 소리를 주관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암송을 규칙적으로 하다 보면 신장의 기운이 튼실해진다는 뜻도 된다. 소리를 내려면 턱관절을 유연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 운동은 특히 뇌를 자극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암송과 더불어 중요한 공부법 하나가 구술이다. 구술이란 어떤 상황이나 문맥을 서사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이다. 대상을 장악하는 힘, 대상과 교호하여 새로운 국면을 연출하는 테크닉이기도 하다. 책이나 영화, 기타 다른 자료를 접한 다음, 그걸 재현해 보라고 하면 그 학생의 지적 수준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말하기를 훈련하면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식이란 근원적 서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천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정보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든 '절단, 체취'해야만 앎으로 변환되는데, 그때 그것은 반드시 어떤 맥락 속에 놓여야 한다. 정보의 계열에 '서사적 육체'를 입힐 수 있어야 비로소 지식의 영여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구술 능력이란 단순한 말솜씨가 아니라, 삶과 인간,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의 표현이다. 삶에 대한 통찰 혹은 애정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엮는 능력이 생기고, 거꾸로 이야기의 맛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과 인생에 대한 깊은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글쓰기를 훈련하기 전에 이 능력을 먼저 키워야 한다. 즉, 책을 읽은 다음 독후감이나 감상문을 쓰게 하는 것 보다 먼저 그것을 자기식 어법으로 재현해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술 능력은 리더십으로 연결된다. 사실 리더십의 많은 부분은 상황을 '언어화하는 능력'이다. 어떤 상황에서 그걸 하나의 주제로 엮을 수 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때 그는 그 그룹의 지도자가 된다. 진정한 유머는 무엇보다 사건과 사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와 간극을 관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유머의 기술과 구술 능력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앎의 코뮌에 접속하고, 암송과 구술을 익히고, 그걸 통해서 리더십을 터득하는,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면? 바로 독서다. 
책을 읽으면 제갈량이나 허생만큼은 아니더라도 누구든 신체의 에너지와 기운의 분포를 바꿀 수 있다. 한 권을 읽으면 한 권 만큼, 백권을 읽으면 백 권 만큼. 절대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다. 근기가 좋아야 책을 읽을 수 있고 거꾸로 책을 읽으면 근기가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삶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 울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거나 읽으면 안된다. 반드시 내 몸과 운명을 바꿔 줄 책을 읽어야 한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고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자 매트릭스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평생 경험할 수 있는 시공간은 얼마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전이 있기에 그 협소한 시공간을 넘어 아득한 역사의 궤적을 조망할 수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비전을 탐구할 수도 있다. 독서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고 싶다면, 먼저 고전을 문학, 그것도 서양문학 중심으로 사고하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장 좋기로는 <서유기>, <수호지>, <홍루몽>, <옥루몽> 등과 같은 장편을 도스토프예스키나 톨스토이, 푸루스트나 보르헤스 등 사상적 깊이를 갖춘 서양소설과 함께 읽는 것이다. 소설적 재미도 맛보고 동시에 사유의 힘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노자와 장자, 사서삼경 등 동서양의 사상사를 넘나들어야 한다. 지금은 불교의 가르침과 첨단 과학이 서로 마주쳐 새로운 패러다임이 구성되고 있는 중이다. 
고전은 눈이 아니라 소리로 만나야 한다. 그래야 기질이 바뀌고 내공이 삻이는 법이므로 암송과 구술이 그것이다. 우리 시대에 공부란 책을 읽는 것이고, 책 중에서도 고전과 접속하는 것이다. 독서는 결코 선택이나 취미가 아니라 필수며, 특히 고전읽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 공부는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므로 뭔가 다르게 살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자신이 '호모 부커스(책읽는 존재)'임을 환기해야 하리라. 
새로운 질문을 던질 것, 하나의 논리로 관통할 것 - 글쓰기의 초식이다.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더 큰 앎이 흘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출 것이다. 문장에 흐르는 기세나 빛깔만 보고도 장차 어떤 인물이 될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거꾸로, 문체를 바꾸고 싶으면 모름지기 표정을, 몸을, 삶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호모 쿵푸스의 글쓰기 이념은 이 한 구절로 압축된다. 용맹정진!
자본과 기술만으로는 결코 삶과 존재가 충만할 수 없음을 공감하게 되었다. 반복과 공허. 인문학의 정수는 고전이다. 고전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와 삶의 구원'에 대한 비전탐구서를 뜻한다. 열정과 지혜는 존재의 두 축이다. 따라서 나란히 함께 간다. 열정이 없는 지혜는 무기력하고, 지혜와 무관한 열정은 위태롭다. 고전의 스승들은 말한다. 번뇌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때가 바로 공부할 때라고. 번뇌와 깨달음은 동시적인 것이라고.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디지털 세대는 뭔가를 기억하기 위해 몸부림쳐 본 경험이 없다. 암송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탁월한 교육법이었다. 독서란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텍스트의 모든 내용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외우는 것이었다. 아니 외운다는 말은 부적합하다. 텍스트와 신체가 한 몸이 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운동과 순환이다. 뇌를 활성화하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이빨과 턱을 움직여야 하고, 사지를 특히 발바닥을 움직여야 한다. 지금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이 몰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변화, 성숙, 창조의 기초에 바로 '공부'가 있다. 

책을 읽어야 우주적 존재가 될 수 있다. 공부를 하다보면 또 한번의 비약이 일어난다. 즉 언어와 문자의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것이 '책'이 되는 경이를 체험하게 된다. 그야말로 문자와 몸과 세계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앎은 행위에서 시작되고, 행위는 앎의 완성(왕양명)"이 되는 '지행합일'의 경지 이것이 바로 고전의 학인들이 지향했던 공부의 진경이다.
공부의 길에는 크레 두가지가 있다. - 책을 통해 존재와 세계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존재와 세계의 모든 것을 책으로 변환하는 것. 책을 읽으면 삶이 보이고, 일상을 잘 관찰하노라면 책의 지혜가 확연해지는 식으로.  인생에는 한가지도 버릴 것이 없다!
남을 웃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스스로 잘 웃는 것이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는 것, 그것은 늘 명랑한 웃음으로 표현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웃음에는 반드시 좋은 관계들이 전제된다. 
사람들은 병이 닥쳐오면 그때부터 고통과 죽음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다. 죽음이 삶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걸 그제서야 자각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죽음을 사유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삶에 대한 성찰도 깊어진다. 그런 점에서 질병과 죽음은 스승이자 좋은 친구인 셈이다. 특히 죽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탐구해야 할 주제다. 
역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주는 우주가 우리에게 새겨 놓은 무늬이다." 
"자기 사주는 자기가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해석하고 창조적으로 삶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선사판 후이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한 후에 마지막으로 화룡점정으로서 보겠다 할 때 영감으로 작동합니다. 내 인생을 어떻게 칠해 갈까 하는 영감과 가능성의 창조 행위입니다.(임성원)" 최고로 좋은 운세란, 운명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운명애(Amor fati)! 설령 운이 좀 나쁜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그것을 인생의 자산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개발하는 것, 다시 말해 화를 복으로 바꾸는 습관 혹은 훈년 말이다.
성인이란 남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 부지런히 배우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공부를 접었으면서 자식들한테만 공부를 강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식들이 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모도 자식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 앞으로는 직업과 가족의 유동성이 더 한층 심화될 것이다. 평생직장은 이래저래 불가능하다. 이럴 때일수록 당장의 성공에 끌려다니지 말고, 인생일 길게 보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승이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배움을 가르치는 이, 배움의 열정을 촉발하고 전염시키는 배움의 헤르메스, 그가 곧 스승이다.
밥심.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으로 밥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밥은 일용할 양식일 뿐 아니라, 함께 먹으며 신체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우리가 밥을 먹는 건 곡식에 담긴 정, 기, 신을 먹는 것이라 한다. 정, 기, 신은 바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그 순간 동일한 '생명의 장'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다.
요가와 명상을 하고 <논어> 한두 구절을 암송하고, 오후엔 고전시가와 현대시를 암송한다. 암송을 강조하는 건 지식과 몸이 하나라는걸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다. 사람들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어떤 음식이든 즐겁고 유쾌하게 먹을 수 있는 능력이다. 
에피쿠로스는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부하는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있다는 바로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고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스스로가 '호모 쿵푸스'임을 자각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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